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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를 파괴하는 것을 파괴하는 게 잘못인가?"
<서울 여성 영화제> 바바라 토이펠 감독의 <베를린의 여걸들>
강윤주 기자
 
 
ⓒ2003 wffis

영화 <베를린의 여걸들(Gallant Girls)>은 80년대 후반 독일 서베를린 지역 크로이쯔베르크에 살았던 일곱명의 여자들 이야기다. 이들은 단순한 공동주거집단이 아니라 모든 것을 공유하자는 의미에서의, 그리고 정치적 의미에서의 공동체를 이루었고, 무정부주의적, 페미니즘적 정치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이 영화에서 보여주는 것은 80년대 말에서 90년대에 이르는, 이들 공동체로 보아서는 그들이 처음 만나 헤어질 때까지의 기간이자, 독일이라는 나라의 역사로 보자면 20세기 중요한 사건의 하나로 꼽힐 독일 통일이 이루어졌던 기간 동안의 일들이다.

바바라 토이펠 감독은 이 영화를 만든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로, “역사책에 씌어지지 않은 역사를 드러내어 보여주고 싶었던 욕구”를 들었다. 영화 속 중요한 사건 중의 하나였던 ‘반 IMF 투쟁’으로부터 15년이 지난 지금 영화가 나오기까지 그녀는 혼자서 3년간 대본을 쓰고 2년간 영화를 찍고 편집할 정도로 공들여 이 역사를 매만졌던 것이다.

“역사책에 씌어지지 않은”이라는 말은 특히 ‘반 IMF 투쟁’, ‘반 World Bank 투쟁’과 연계시켜 이해할 수 있겠다. 99년 시애틀에서 일어난 ‘반 WTO 투쟁’ 이후에야 ‘반세계화 운동’이 전 세계적으로 알려졌지만, 이미 독일에서는 80년대 후반 IMF와 World Bank의 실체를 들여다보고 이들 기구가 전 세계 자본주의 체제의 극대화를 위해 어떤 기능을 하는지 사람들에게 알려야 한다고 생각했다는 것이 감독의 주장이다.

그러나 영화는 반드시 거대한 정치적 투쟁의 역사만을 묘사하고 있지는 않다. 감독이 자신의 작업의 모토로 삼고 있는 점은 “여성의 모습을 새로운 각도에서 보기, 새로운 여성의 모습을 보여주기”이다. 우리나라의 이른바 운동권 내에서도 뿌리깊게 존재하는 가부장적 사고로 인한 병폐가 최근 몇 년간 불거져 나오기도 했거니와, 이 영화에서도 같은 정치적 노선을 걷고 있다고 하면서 여자에 대한 차별적 태도를 일삼는 남자들의 모습을 볼 수 있다. 독일도 별 다르지 않았음을 실감하게 하는 대목이다. (세계의 여성들이여, 그러므로 단결하라!)

이런 연장선상에서 공동체 친구들의 동성애적 성향은 ‘정치적 의미에서’ 상당히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진다. 그들은 가부장적 사고가 한 가정, 한 개인에게 미치는 무서운 영향을 제대로 파악했고, 그런 의미에서 가부장제가 타파되지 않는 한 어떤 정치적 변화도 이루어질 수 없다고 믿었다. 주인공격으로 나오는 보니는 심지어 “모든 이성애는 반동적”이라고까지 주장하며 “모든 여자들이 레즈비언이 되는 날” 비로소 변화가 가능할 것이라고 소리친다.

 

 
 
ⓒ2003 wffis

영화를 본 관객 중에는 이들 공동체 구성원들의 급진적이고 때로 파괴적인 모습이 페미니스트에 대한 선입견을 더 공고히 하지 않겠느냐는 질문을 던지기도 했다. 이에 대한 감독의 대답은 걸작이었다. “우리를 파괴하는 것을 파괴하는 것이 왜 잘못인가?” 정당방위라는 뜻으로 해석할 수도 있겠다.

감독이 계속적으로 강조하는 또 한가지 요소는 “삶은 변화한다”는 점이다. 이 영화는 감독의 자전적 영화로서 그렇다고 완벽하게 실화에 근거한 것만은 아니고 감독이 이리저리 인물의 성격을 바꾸거나 재창조한 경우도 많은데, 중간중간 실제 인물들과의 인터뷰 부분이 등장한다. 이를 통해 관객은 당시 동성애자였던 많은 이들이 후에 이성애자로 살아가고 있음을 알게 되는데 그게 어떻게 가능하냐는 질문을 던진 이들도 많았다.

감독은 이에 대해 “세상은 끊임없이 변하고 사람도 변한다. 아니 마땅히 그래야 한다. 그 당시 친구 중에는 동성애자였다가 다시 이성애자로, 그러다가 다시 동성애자가 된 이도 있다”고 대답했는데, 물론 이 문제에 대해서는 이들이 양성애자구나, 라고 간단히 생각해 버릴 수도 있겠으나 이 대답을 통해 그녀가 말하려고 했던 점은 그게 성애에 관한 문제이건 정치적 의식에 관한 문제이건 그때 이랬으니 지금도 이래야 하는 것 아니냐 식의 논리는 옳지 않다고 본다는 말이었다.

@IMG3@ 감독은 공동체를 꾸리고 살아갔던 당시 모습에 대해 모든 것을 옳았다 틀렸다는 식으로 판단하고 싶지 않아 했다. 그들은 현실의 모습이 잘못 되었다는 것은 알았으나 어떤 방식의 대안적 삶이 옳다는 모범은 가지고 있지 않았다. 하고 싶지 않은 것, 옳지 않다고 생각되는 것들을 골라내어 버리는 방식으로 살다 보니 그런 형식의 공동체가 꾸려졌고, 그들이 시도해 본 삶의 방식, 투쟁 방식 또한 하나하나가 처음 해보는 실험이었을 뿐으로, 그들이 결국 헤어지게 된 점에 대해서도 감독은 슬프다거나 유감스럽다는 느낌보다는 하나의 실험이 끝났다는 생각만을 했다는 것이다.

이 영화는 올 베를린영화제 때 처음으로 관객들에게 소개되었다. 공동체 구성원의 거칠고도 재치있는 언어, 원어를 알고 그 나라의 문화를 깊이 이해해야 알 수 있는 영화의 재미 때문에 독일 관객들은 몇 부분에서 유쾌하게 웃어제꼈다고 한다. 극장에서 관객과 함께 영화를 보는 일이 너무나 두려워서 한번도 시도해보지 않았다는 감독을 설득해서 데리고 들어간 일은 어쩌면 실수였는지도 모른다.

그녀는 베를린의 관객들과 달리 거의 웃지 않고 조용하게 영화를 보는 관객들의 반응에 무척 당황했다. 그러나 한국의 관객들은 “관객과의 대화” 때 뜨거운 질문 세례로 그녀의 불안감을 없애주었고 이어지는 사인 요청과 카메라 공세, 또 각종 매체의 인터뷰 요청에 대학 강연 초청까지 <베를린의 여걸들>에 대한 반응은 놀라울 지경이었다.

“20대 아가씨들이 내게 와서 영화를 잘 보았다며 사인 요청을 하는 일이 너무나 많았다. 젊은 그들이 내 영화에 반응하는 것이 나는 정말 기쁘다. 내 영화가 정치적 운동에 조금이라도 기여했다는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라는 감독의 말처럼, 영화는 20대 영화 관객들의 어딘가를 제대로 건드리는데 성공한 것 같았다.

그것이 이 영화가 진지하고 심각하면서도 열정적이고 뜨거운 젊음의 분위기를 잃지 않았기 때문인지, 영화 속 중요한 테마로 나오는 인물들의 사랑 이야기 때문인지, 아니면 역사적 자료 화면과 픽션 부분, 그리고 실제 인물들의 인터뷰를 상황에 맞추어 때로는 몽환적으로, 때로는 건조하게, 때로는 신나게 그려낸 감독의 연출 솜씨 때문인지, 나는 잘 모르겠다.

그러나 한가지 바라고 싶은 것은, 독일에서 8월에 개봉한다는 이 영화에 우리나라 배급사도 관심을 보여 더 많은 젊은 관객들이, 또 왜 젊은 관객들이 이 영화에 열광하는지 궁금할 한 때 젊었던 관객들이 볼 수 있게 되는 일이다.


2003/04/19 오후 1:05
ⓒ 2003 Ohmy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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