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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벌거벗고 관계의 진실과 만나자
[서울 여성 영화제] 독일 감독 도리스 되리의 <벌거숭이 게임>
강윤주 기자
하루에 두 편의 독일 영화를 보았다. 그것도 상당히 양 극단에 서 있는 것으로 느껴지는 두 편의 영화. 그중 한편은 바바라 토이펠의 <베를린의 여걸들>이고, 다른 한편은 감독인 도리스 되리가 자신의 소설 <해피>를 영화화한 <벌거숭이 게임>이었다.

<베를린의 여걸들>은 68세대 정신을 이어받은 여자 일곱 명이 공동 주거하면서 겪게 되는 일상의 어려움과 그들의 정치적 활동을 그린 영화이고 <벌거숭이 게임>은 세 쌍의 남녀가 파트너와의 관계를 어떻게 꾸려나가는가를 '케이스 바이 케이스'로 보여주고 있다.

이 두 영화를 비교하는 기사를 쓰는 것도 재미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베를린의 여걸들>은 며칠 뒤로 잡혀 있는 바바라 토이펠과의 인터뷰와 연계시켜 소개하는 것이 낫겠다 싶어 오늘은 <벌거숭이 게임>에 대해서만 소개하려고 한다.

 
 
 
ⓒ2003 constantin

영화의 줄거리는 대단히 단순하다. 토요일 저녁, 식사를 함께 하기로 한 세 쌍의 남녀가 각각 외출 준비를 하면서, 또 식사 준비를 하면서 나누는 대화가 영화의 반을 차지하고, 나머지 반은 이들이 모여 함께 식사하면서 한 사람의 뜻밖의 제안에 응하여 <벌거숭이 게임>을 하는 것에 할애된다.

뜻밖의 제안이란, 모두들 옷을 벗고 각자 파트너를 찾을 수 있는지 실험해 보자는 것. 20년이 넘게 같이 산 파트너들이 눈을 가린 상태에서 상대방을 찾는 실험을 했는데 제대로 찾는 이들이 거의 없더라, 라는 말이 그들을 자극한 것이다.

제안자와 그의 파트너는 심판으로 빠지고 나머지 네 명의 남녀가 나체가 된 상태로 서로의 몸을 더듬어 자기의 파트너를 찾는 일에 몰두한다. 그들이 옳게 자기의 파트너를 찾았는지 않았는지는 이곳에서 언급하지 않기로 하자. 작은 궁금증을 남겨두는 것도 좋으니 말이다.

그러나 사실 이 영화에서 중요한 부분은 이들이 파트너를 찾았는지 찾지 못했는지, 혹은 그 게임 뒤 그들의 관계가 달라졌는지가 아니라 이들이 그 게임 전후에 나누는 대화, 그리고 그들이 사는 방식이다. (일종의 반전, 혹은 관객들의 호기심 자극 포인트로 기능했어야 하는 영화 속 <벌거숭이 게임>은 그저 '팬 서비스' 차원에서 볼거리를 제공하기 위한 것처럼 느껴졌다. 조금만 더 나아갔으면 소프트 포르노가 될 뻔한 이 장면이 몇몇 보수적 한국 관객에게는 다소 당혹스러울 수도 있을 것이다.)

영화에서 가장 먼저 소개되는 커플인 에밀리아와 펠릭스는 한때 운명이라고 생각될 만큼 뜨거운 사랑을 나눴다. 그러나 이제 남남이 되어버린 그들은 처음 만난 순간조차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또한 그들을 초대한 친구 커플 샤를로테와 딜란에 비해 경제적으로도 거의 파산 지경이다. 에밀리아는 방안에 텐트를 쳐놓고 그 안에서 자며 커다란 구명보트를 소파 겸 바닥에 깔아놓고 산다.

세 쌍 중 아직 행복한 관계를 유지하고 사는 이들은 아네테와 보리스. 보리스는 아네테에게 아직도 대단히 열정적이며 아네테는 보리스를 만난 게 자기 생 최고의 행운이라고 믿고 있다. 아네테는 자신들의 경제적 지위에도 상당히 만족하고 있지만 보리스는 친구 딜란이 증권 투자로 떼돈을 번 데 대해 부러움을 감추지 못한다.

 

▲ 에밀리아역의 하이케 마카치와 펠릭스역의 베노 퓌어만
 
ⓒ2003 constantin

이들의 집은 유럽의 젊은 중산층 가족이라면 누구나 한 가지쯤 가지고 있는 스웨덴의 D.I.Y. 가구 생산업체 '이케아' 물건으로 꾸며져 있다.

샤를로테와 딜란의 집을 들여다보는 일 역시 재미있다. 온통 고가의 이른바 '디자이너 가구'로 치장한 집에서 그들은 풍족한 삶을 누리고 살지만 샤를로테는 그들이 부자가 되기 이전의 소박했던 삶을 더 그리워한다. '그녀를 보고 있지만 실은 그녀를 보고 있지 않은' 딜란을 안타까워하는 샤를로테에게 딜란은 말한다.

"나 역시 그렇게 느껴. 당신은 나를 보고 있지만 나를 보지 못해. 하지만 우리의 차이점은, 나는 그 사실을 그저 인정하고 받아들인다는 거지."

오래 묵은 커플이 서로에게서 더 이상 새롭거나 흥분되는 점을 찾지 못한다는 사실을 그저 받아들이고 포기하거나 다른 사람에게서 찾으려는 딜란(딜란은 실제로 에밀리아와 정사를 갖기도 한다)과 달리 샤를로테는 어떻게 해서든지 둘의 관계를 회복시키고 싶어한다.

이 영화에서는 함께 한 지 오래된 커플이 겪을 수 있는 온갖 문제가 판도라의 상자에서처럼 마구 튀어나온다. 그리고 그들의 결론은 한결같다. 익숙한 사람에게서 더 이상 새로움을 느낄 수 없는 것은 인간의 본성이라는 주장이다. 그래서 에밀리아는 펠릭스에게 "떨어지기 두려워서 섹스로 그 두려움을 덮어버리고 그냥 그렇게 지내려던 것이 우리의 문제"라고 말하며 그들이 사귀었던 5년만큼 떨어져 있어보면 관계가 회복될지 모른다고 말한다.

오늘의 에밀리아/펠릭스의 문제가 내일의 샤를로테/딜란의 문제가 될지도 모른다. 어찌 보자면 지금 가장 관계가 좋은 아네테/보리스 역시 샤를로테/딜란을 거쳐 에밀리아/펠릭스의 상태로 치닫게 될지도 모른다. 물론 각 개인의 성향이 다른데 이런 도식을 세우는 건 말이 안 된다고 하는 이도 있겠지만 말이다.

아쉽게 느껴졌던 점은 위에 언급한 도식이 저절로 떠오를 정도로, 감독이 이 영화에 교과서적 대사를 많이 집어넣고 또 다소 지루하게 편집했다는 것이다. 특히 행복한 커플 아네테/보리스의 대사는 어디 부부 상담소 팸플릿이나 성인을 위한 도덕 교과서에서 베껴오지 않았나 싶을 정도로 너무 반듯해서, 진부했다. 또한 이들 커플의 문제를 사회적 차원, 혹은 구조적 차원에서 언급하려는 시도는 전혀 없이 그저 인간의 개인적 욕망이라는 면에서만 해석하려고 하는 듯싶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를 사회적 차원에서 볼 수 있는 하나의 포인트는 앞서 말했던 그들이 옷 입는 방식, 집을 꾸민 방식, 음식에 대한 취향 등이다. 삐에르 부르디에의 취향 분석을 위한 다큐멘타리 필름이라고 해도 될 만하게 디테일을 꼼꼼히 표현하려 한 흔적이 보인다.

이 영화를 관람하는 동안 몇 장면에서 한국 관객들은 크게 웃어댔다. 그 부분이 바로 독일 감독과 한국 관객이 절묘하게 교감했던 부분이 아닐까 한다. 교과서적 면이 있다고 평가했으니만큼 이 기사도 교과서적으로 끝내볼까 한다.

재미 80%, 의미 20%인 영화.


2003/04/13 오전 11:08
ⓒ 2003 Ohmy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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