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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윤주 교수의 홈페이지

이곳에 있는 글들은 KBS Worldnet 에 있는 제 영화 칼럼 "New German Cinema" 에 실린 글들입니다.
자료를 다른 곳에 사용할 때는 반드시 출처를 밝혀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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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들레 꽃 한 송이를 손에 들고 잎을 하나하나씩 떼면서, “그는 나를 사랑한다”, “사랑하지 않는다”, “사랑한다”, “사랑하지 않는다”를 계속 반복하는 행위, 다들 아시죠? 독일에서는 두 가지 중에 하나를 고르는 것이 아니라 세 가지 중에 하나를 고른답니다. “그는 나를 사랑한다”, “그는 나를 고통스럽게 사랑한다”, “사랑하지 않는다”… 고통이 동반된 사랑, 그것 한 가지가 더 끼어 있는 것이죠. 어느 사랑에 고통이 동반되지 않고 오로지 기쁨만이 있겠습니까마는, 사랑의 고통에 대한 두려움 때문인지, 아니면 기쁨만 있는 사랑을 하고 싶다는 열망 때문인지, 하여간 독일인들은 사랑에 대해 두가지가 아닌 세가지 선택 사양을 두고 있는, 우리와는 다른 족속들입니다.

이 고통스러운 사랑을 한 어느 여인의 실제 이야기를 다룬 영화 하나를 소개할까 합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유감스럽게도 극장에 그 간판이 걸리지 않았지만 다행히 비디오로 나와 있다 하니, 제 글을 읽고 이 영화에 관심이 가시는 분들은 당장 영화 나라 같은 큰 비디오 대여점에 전화해 보시기 바랍니다.
제목은 “에이미와 재규어 (Aimée und Jaguar)“ 입니다. 이 이름들은 릴리와 펠리쩨라는 두 여인이 서로를 불렀던, 말하자면 애칭 같은 거지요. 그래요, 두 여인. 연인이었던 두 사람은 당신의 상상과 달리 여자와 남자가 아니라 두 여인입니다.

2차 대전이 바야흐로 그 막바지로 치닫고 있었던 1943년, 나찌 장교의 아내이자 네 아이의 어머니로 전형적인 가정 주부인 릴리 (Juliane Koehler) – 흠... 이 여자가 따로 정부를 두고 있었던 것도 전형적인 가정 주부로서의 요소에 들어간다, 고 말해야 할지는 독자들 여러분께 그 판단을 맡깁니다 – 는 우연히 한 음악회에서 펠리쩨 (Maria Schrader)를 만납니다.

운명적인 사랑이 대부분 그렇듯이 릴리는 펠리쩨에게, 펠리쩨는 릴리에게 저항할 수 없는 매력을 발견하는데, 자의식 강하고 지성적인 펠리쩨는 그 다음날부터 당장 릴리에게 재규어라는 필명으로 연애 편지를 쓰기 시작합니다. 우연을 가장한 몇번의 만남으로 펠리쩨는 릴리와 가까워지고 어느날의 잊을 수 없는 키스 이후 둘은 연인 사이가 되지요.

그때까지도 릴리는 펠리쩨가 누구인지 정확히 그 정체를 알지 못하는데, 어느날 펠리쩨는 자신이 레지스탕스의 일원이며 유대인임을 밝힙니다. 나찌 이데올로기에 전도되어 있다시피 했었던 릴리에게는 큰 충격이었겠지요. 그렇지만 릴리는 변함없이 펠리쩨를 사랑하고 그 뒤로 유대인에 대한 그녀의 생각 역시 바뀝니다. 전쟁 막바지 유대인 검거에 더욱 열을 올리는 괴벨스의 발악을 피해 떠나는 자신의 유대인 친구들과 달리 사랑을 위해 베를린에 남은 펠리쩨에게는 검은 그림자가 닥쳐오고...
 

결론까지 말씀드리면 비디오 빌리려고 전화기 들던 손을 내려 놓으실 수도 있을 것 같아 „주말의 명화“ 광고처럼, 줄거리 소개는 여기까지만 하려고 합니다. 이 영화의 결말보다도 더 흥미로운 것은 사실, 앞에서도 말씀드린 바와 같은, 전쟁 막바지 나찌 정권의 발악과 같았던 유대인 색출이 어쩌면 그렇게 일제의 마지막 단말마와 비슷한가, 하는 역사적 모습과, 아직도 살아있는 릴리의, 영화에 그려지지 않은 그 이후 일생 이야기거든요.

이 영화는 1943년과 44년 베를린에 가해졌던 대폭격을 그 역사적 배경으로 삼고 있습니다. 2년여에 걸친 대폭격, 생각해 보세요, 베를린에 남은 건 잔해밖에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45년까지 버틴 나찌도 정말 독하다고밖에 볼 수 없지요?
히틀러의 선전 대장이었던 괴벨스는 이미 43년에 패전의 낌새를 알아차렸을 텐데도 불구하고 43년 4월 20일 히틀러의 54번째 생일에 „유대인 없는 베를린을 선물하겠다“고 큰소리를 쳤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유대인 색출 작업은 더욱 극악해졌지요. 어떠세요, 패색 기운이 짙어지면서 더 악랄해졌던 일본 제국주의 생각이 나시지 않나요?

자, 이제 릴리 이야기로 들어가 볼까요? 릴리에게 물어보면 아마 „아니, 나는 후회하지 않아“ 하고 단호하게 고개를 젓겠지만, 제 삼자의 입장으로 보아서는, 펠리쩨를 만나지 않았던 릴리의 인생이 릴리에게 훨씬 더 나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만드는 릴리의 고통스러운 사랑 이야기를 들어봅시다.

45년 5월, 전쟁이 끝나고 난 뒤 릴리는 나찌에게 끌려간 펠리쩨를 찾기 위해 기차역에 서서 지나가는 기차에마다 펠리쩨의 사진을 보이며 누구 그녀를 본 사람 없냐고 물어봅니다. 라디오 방송에 광고를 내고 전단을 뿌렸으며 나찌에게 끌려갔다가 살아돌아온 사람들을 하나하나 찾아다니고 유엔 기구에도 의뢰를 하지만 모두 헛수고였지요.

펠리쩨에 대한 사랑으로 릴리는 전쟁 당시, 펠리쩨가 끌려간 뒤로도 세명의 유대인을 숨겨주었습니다. 그 공으로 그녀는 정부에서 훈장을 받게 되는데, 그 훈장을 받은 뒤 두주가 지났을 때, 그녀의 문은 온갖 이들이 발라놓은 오물로 악취가 그칠 날이 없었답니다.
 릴리는 이 영화가 제작되었던 98년 당시에는 85세의 나이로 베를린에 살아있었다는군요. (지금도 살아있는지는 확인해 보질 못했네요.)
 
동성 연애 이야기지만 거부감을 일으킬 만한 장면은 거의 나오질 않습니다. 사랑 영화에 흔히 나올 수 있는 과잉 감정적 장면도 없습니다. 아마도 독일 영화이기 때문이겠지요, 어쩌면 건조할 정도로 직설적입니다. 어떤 이들은 이 영화를 „전형적인 베를린 영화제를 위한 작품“이라고 비아냥거리기도 하는 모양이더군요. 역사 조금, 그것도 나찌 역사, 게다가 베를린의 모습 조금, 보고 나서 금방 잊을 수 있을 정도로 지나치게 상처를 건드리지는 않는다고... 하지만 베를리너도 아니고 독일인도 아닌 우리야 그 „전형성“이 무엇인가를 알기 위해서라도 한번 볼 만하지 않을까요?
한 기사의 호흡치고 너무 긴 것 같아 주인공인 마리아 슈라더 얘기는 이 다음 기사에 할랍니다. 궁금하신 분은 다음 기사를 클릭해주세요!
 

2001.0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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