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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윤주 교수의 홈페이지

이곳에 있는 글들은 KBS Worldnet 에 있는 제 영화 칼럼 "New German Cinema" 에 실린 글들입니다.
자료를 다른 곳에 사용할 때는 반드시 출처를 밝혀주세요.

테러 현장의 사진: 도이취 방크의 총수 알프레드 헤어하우젠이 타고 있던 리무진은 1989년 11월 30일 독일 적군파의 테러에 의해 폭파되었습니다. (dpa 사진)

독일, 하면 떠오르는 단어 중의 하나가 정확함과 질서죠. 독일 TV 뉴스에 나오는 시위 장면을 보아도 우리나라처럼 짱돌을 던지고 화염병이 날아다니는 모습은 좀처럼 볼 수 없습니다. 줄 잘 맞춰 서서 경찰의 호위(?)를 받으며, 그렇지만 말로는 자기 주장을 과격할 정도로 강력하게 내세우죠.

이런 나라의 현대사에도 테러리즘으로 점철된 한 시대가 있었습니다. 1985년 이래 이른바 적군파 (Rote-Armee-Fraktion: 줄여서 RAF) 의 이름으로 행해진 여섯건의 테러는 이 정확한 나라 독일에서 아직까지 미결된 사건으로 남아 있습니다.

이 미결된 사건 중 하나를 가지고 다큐멘타리 영화가 만들어졌습니다. 미결된 사건을 다루는 영화에 걸맞는 제목 "Black Box BRD" 를 달고 나왔죠. 아는 분들은 아시겠지만 RAF 는 전 유럽과 미국 등지를 휩쓸었던 68 세대 운동 이후 좌파적 성향으로 돌아선 이들이 만든 테러 조직으로서 독일에서 모두 합쳐 스물여섯명의 정, 재계 인물들을 테러했습니다. 그 중 하나가 독일의 가장 큰 은행인 "도이취 방크 (Deutsche Bank)" 의 총수 알프레드 헤어하우젠이었죠.

(독일 적군파에 대해 더 알고 싶으신 분은 http://www.donga.com/fbin/news_plus?d=news132&f=np132hh010.html 로 가 보세요. 자세한 내용이 나와 있습니다.)

영화 첫 장면은 헤어하우젠의 차가 어떻게 폭파되는가를 보여줍니다. 폭파 직전의 정적과 직후의 섬뜩함은 영화를 실제로 보지 않고는 전달되지 않을 터이니 생략하겠습니다. 제가 보기에 중요한 건 "라인강의 기적"을 일구어냈던 세대 중의 한 사람인 헤어하우젠과, 그 헤어하우젠을 테러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는 적군파의 한 사람 볼프강 그람스, 이 두 사람의 죽음 직전까지의 삶과, 희생자와 살인자라는 극단적 위치에 서 있는 이 두 사람이 독일 현대사 속에서 보여주는 묘한 공통점들입니다.

사진 왼쪽에 보이는, 1930년에 태어난 알프레드 헤어하우젠은 나찌 엘리트 학교를 나온 사람으로 영화에서 암묵적으로 표현되기로는, 은행업의 중요성을 일찌감치 알아차리고 그 업계에서 빨리 성장하기 위해 결혼도 정략적으로 은행가의 딸과 합니다. ( 헤어하우젠은 결국 이 첫번째 부인과 이혼을 하죠.) 도이취 방크에서 그와 함께 일했던 다른 이사들은 모두 한결같이 그가 과업지향적인, 치밀한 인물이었으며,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취임 첫날 전화 교환수들에게 꽃을 사가지고 가서 인사할 정도로 매너있는 사람이었다고 입을 모읍니다.

반면 볼프강 그람스는 언뜻 보기에 미국의 히피 세대를 연상시키는 외모를 가진 인물로 군입대를 거부하고 친구들과 함께 공동체 생활을 하면서 끝없는 정치적 토론의 밤들을 보낸 사람이죠. 영화는 그를 소개할 때 그의 정치정 성향부터 시작하지 않습니다. 그가 얼마나 음악과 연극에 소질이 있었는가, 장애인을 위한 봉사 활동을 하며 어린 소년의 나이에도 그들을 위해 임종의 자리까지 지켰다는 것 등을 보여주죠.

이 두 사람이 가진 공통점 중 하나는 "이상주의"입니다. 헤어하우젠은 제3세계 국가가 도이취 방크에 진 빚을 면제해주는 것으로 당시 많은 68세대인들로부터 호감을 얻었습니다. 다른 말로 하자면, 헤어하우젠은 자본가로서 나름대로의 신념을 가지고 세상을 경영했던 셈입니다. 그람스는 테러 행위에 대해 묻는 친구들에게 "제3세계에서는 수천, 수만명이 전쟁으로, 기아로 죽어가고 있다."는 말로 대답을 대신했다고 합니다. "이상주의"라는 하나의 뿌리에서 뻗어나간 두개의 가지가 독일의 현대사에서 보여주는 양 극단의 모습, 이 영화는 이 양 극단에 선 두 사람을, 희생자와 살인자로 묘사하지 않고, 오히려 관객의 입장에서는 혼란스러움과, 울분과, 서글픔을 가득 안고 극장을 빠져나오게 만듭니다.

감독인 안드레스 파이엘은 인간 심리를 잘 이해하기 위해 심리학을 공부한 사람으로 -정신 상담의가 되려는 목적으로 심리학을 공부하는 대개의 사람들과 달리 그는 한번도 심리학으로 먹고 살려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그의 이전 다큐멘타리 필름들에서도 그 특유의 인터뷰와 편집 방식이 드러나지요. 한 마디의 나레이션 없이 오로지 인터뷰만으로 영화 전체를 끌고 가는 것, 전혀 역동적이지 않은 정지된 카메라로 인터뷰 대상을 참을성 있게 바라보기, 말하는 도중에 수십초의 인터발을 가지는 -예를 들어 그람스의 아버지는 자신이 나찌에 자원했다는 고백을 하기까지 굉장히 힘들어합니다- 인물들의 감정 변화를 낱낱이, 잔인할 정도로 자세하게 묘사하는 방식으로 관객에게 독특한 긴장감을 선사합니다.

독일 현대사의 중요한 부분을 알고 싶다면 이 다큐멘타리를 꼭 보라고 권하고 싶습니다. 보고 나서도 아마 수많은 물음표만 떠오르겠지요. 그 물음표가 바로 출발점입니다.

2001.07.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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