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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윤주 교수의 홈페이지

이곳에 있는 글들은 제가 2001~2년에 주부넷의 영화칼럼과 오마이뉴스의 영화란에 썼던 것들입니다.
자료를 다른 곳에 사용할 때는 반드시 출처를 밝혀주세요.

새해가 밝았네요. 말띠해가 밝았습니다. 새해 벽두부터 이런 얘기 꺼내서 좀 안됐습니다만, 말띠해에 태어나는 여자는 팔자가 드세다고 이 해에 딸을 안 낳으려는 사람들이 많다지요?

그 얘기를 듣고 저는 참 마음이 착잡했습니다. "팔자가 드세다", 이 말은 대부분 여자에게 적용되지요? 말때해에 태어난 남자에게는 뭐라고들 합니까, 기가 세서 세상을 다스릴 수 있다고들 하지 않습니까? 남자에게 긍정적으로 작용하는 그 기운이 여자에게 적용되면 "드센 팔자"의 원인이 되는, 피해야할 기운으로 해석되는 이 세상, 이 세상에서 여자가 자기 기운 펼치고 살기는 참으로 고단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태어날 운명은 태어나는 법, 말띠해에 태어날 드센 기운의 딸들에게 바치고 싶어 이 글을 올립니다.



"와호장룡". 영어 제목은 "Crouching Tiger and Hidden Dragon" 이더군요. 번역하자면 "누운 호랑이와 숨은 용"으로, 무협 세계를 네자로 압축한 제목 되겠습니다. 아니 웬 무협지? 하고 고개를 돌리시려는 주부님들, 잠깐, 잠깐만요. 이 영화의 배경과 등장 인물들은 전형적인 무협 영화에 나오는 것들이지만, 제가 보기에 이 영화는 여자들의 이야기를 다룬 색다른 종류의 "여성 해방 영화"입니다.

무협지에 나오는 여자들은 늘, 용맹있는 검객들에게 복수의 원인을 제공하거나 그리움의 대상 정도로만 그려져왔지요. 하지만 이 "와호장룡"의 주인공 여자들은 당당한 검객으로, 그것도 피맛에만 굶주린 검객이 아니라 현명하며 용기있는 검객으로 그려집니다. 무당파 고수인 리무바이는 푸른 여우라는 여자 검객에게 스승을 잃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의 평화를 갈구하던 그는 최고의 검인 청명검을 다른 이에게 맡기고 강호를 떠날 결심을 합니다. 그러나 그 청명검은 누군가에게 도난당하고, 그걸 훔친 이가 북경의 높은 관리의 딸 용이라는 걸 알게 된 그는, 그녀를 한번 본 뒤 그녀가 범상치 않은 검객의 재능을 타고 났음을 알아차리지만, 불행히도 그녀는 그의 원수 푸른 여우의 제자된 몸입니다. 리무바이는 푸른 여우를 뒤쫓고, 용은 무당파에 들어오라는 끊임없는 리무바이의 말을 거절하며 홀로 강호의 고수가 될 것을 고집합니다. 쫓고 쫓기는 가운데 펼쳐지는 리무바이와 그의 영원한 사랑 수련의 로맨스, 거기에 더해지는, 겉으로 보기엔 양갓집 규수지만 검객으로서의 자기의 끼를 어쩌지 못해 떠도는 용과, 평야의 늑대 같은 삶을 사는 그녀의 연인 로의 사랑...

피 튀길 듯하면서도 춤추는 듯한 액션 장면, 목숨을 걸고 쫓고 쫓기는 것 같지만 어떻게 보면 서로 희롱하며 유희하는 것 같은 추격 장면, 특히 대나무 숲에서 리무바이와 용이 싸우는 장면은 부드러움과 강함이 잘 어울린 동양식 무술을 상징적으로 잘 표현하려 애쓴 듯합니다. (하지만 특수 효과의 부족인지 어쩐지 좀 엉성해 보이는 것도 사실이구요. 오른쪽 아래 사진이 리무바이 역의 주윤발입니다.)




시각적 즐거움에 대해 말이 나온 김에 덧붙이자면, 이미 2000년에 극장 개봉되어 더이상 큰 화면에서 볼 수 없다는 게 너무나 아쉬울 만큼 이 영화의 스펙타클한 그림들은 정말 멋집니다. 대국인 중국 영화의 특징 중 하나가 장대한 자연의 표현 아니겠습니까? 구비구비 절경인 산맥과 강들의 모습도 근사했지만, 제게 인상적이었던 것은, 용이 처음 유목민 대장인 로를 만나 한참을 대결하다 마침내 사랑에 빠져 하룻밤을 같이 보냈을 때, 성난 암코양이 같던 그녀가 자기 몸의 곡선을 내보이며 로와 사랑을 나누었을 때, 그 장면 직후에 나온 사막의 모래 언덕들이었어요. 아, 이 영화를 만든 이 안 감독은 정말, 느낌을 시각화하는데 천재적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죠. 여성 몸의 아름다운 곡선과 같은 사막의 모래 언덕들이 용의 몸의 곡선과 겹쳐지며 만들어내는 그 아름다운 에로성...

이렇게 끊임없이 늘어놓다 보면 정말 끝이 없을 것 같아 정신을 다시 차리고 두 여자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처음부터 제 시선을 끌었던 여자는, 실은 이 영화 속에서 악덕의 상징으로 나오는 푸른 여우였어요. 왜 내 스승을 죽였느냐고 다그치는 리무바이에게 푸른 여우는 다음과 같이 말하죠. 네 스승은 나와 함께 자고 싶어했을지언정 나를 자신의 제자로 삼아 무술을 가르쳐주려고 들지 않았어. 그래서 복수했다. 결국 푸른 여우는 리무바이에게 죽음을 당하는데 죽음의 자리에서 그녀는 자기의 제자 용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너는 내 유일한 제자지만, 글을 읽을 줄 모르는 나를 속이고 혼자서 무당파의 무술을 익혀 나를 뛰어넘었다. 내 유일한 제자이자 내 천적, 용... 그녀 운명을 되짚어 보니 어쩐지 슬프더군요. 무술을 배우러 찾아간 스승은 자기를 한낱 암컷으로만 취급하고, 그런 스승을 포함한 세상에 대해 복수의 칼을 갈며 제자를 키우지만 그 제자 또한 자기를 배신합니다. 우리 여자들, 세상에 참여하기 위해 뭐 하나 배우기가 얼마나 힘듭니까? 자기보다 열등하다고 생각될 때에는 귀여워해주며 오냐오냐 하지만, 막상 자기와 대등한 자리에 오르겠다 싶으면 등을 돌리고 심지어 칼을 꽂는 이 남자들의 세상이 "와호장룡"에 나오는 무협의 세계와 무어가 다르겠습니까? 또 거기에 대해 여자의 적은 여자라는 말을 실감하는 상황은 또 얼마나 자주 경험합니까? (그렇지만 같은 여자를 적으로 만들게 하는 것도 남성이 지배하는 사회 구조 때문이라는 것 또한 덧붙이고 싶네요.)

또 한 여자는 리무바이의 연인 수련입니다. 수련은 원래 리무바이의 형과 약혼한 상태였으나 불행한 일로 형은 결혼 전에 죽고, 그 뒤로 서로를 의지해온 두 사람은 이미 오래전부터 사랑하고 있는 사이지만 형에 대한 생각 때문에 두 사람은 결합하지 못하지요. 수련은 처음부터 끝까지 절제된 사랑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리무바이는 용을 살리려다 독화살에 맞아 죽음에 이르게 되는데, 해독제를 구해오겠다던 용은 너무 늦어, 결국 리무바이는 수련의 품속에서 숨을 거둡니다. 돌아온 용의 목에 칼을 내리치는 수련, 하지만 그녀는 리무바이가 용의 재능을 높이 샀다는 점 때문에 용을 죽이지 않고 무당파 수련장으로 떠나 보냅니다. 절제된 모습의 수련이 용의 목에 칼을 대려던 그 순간, 그리고 자신의 슬픔과 분노를 참고 스스로를 억제하는 그 다음 순간, 제 눈에 눈물이 고이더군요. 사랑은 슬픔과 분노를 뛰어넘어 한차원 높은 곳으로 가더군요.



말띠해에 태어났을 것 같은, 아니 그 "악명 높은" 백말띠해에 태어났을 것 같은 용의 삶과 그 삶에 대한 주변인들의 발언은 이모저모로 제게 여성 일반의 삶을 생각해 보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리무바이는 결혼을 며칠 앞둔 그녀를 보고 수련에게 말하지요. 그녀는 공무원의 아내로 평범하게 살 수 있을 여자가 아니야. 수련은 이에 이렇게 답합니다. 그녀가 무당파 수련장에 가서 훈련을 받는다 해도 그녀가 결혼하면 남편이 그녀가 검객으로 사는 것을 막을 것입니다. 결혼식장으로 가는 용의 행렬을 막고 그녀를 납치하려는 그녀의 연인 로에게, 아무 말 없이 돌아가세요 하고 말하는 용, 그러고 나서도 얌전히 결혼하는 게 아니라 홀로 독립해서 검객의 삶을 살아보려는 그녀의 모습을 보며 저는 그래, 용은 사랑조차도 그녀 삶을 가로막는 굴레라는 걸 알았구나 하고 생각했죠. 그러나 그 두 사람은 무당파 수련장에서 결국 만나게 되고 영화는 그 둘이 함께 평야에서 삶을 영위하게 되리라는 것을 암시하며 끝납니다. 용이 평야에서 로와 함께 살게 되더라고 그녀가 꿈꾸던 자유로운 삶을 누리게 될 수 있을지, 로는 얼마나 해방된 남성일지를 문득 생각해 보게는 하지만, 저는 희망적으로 보고 싶었습니다. (왼쪽 사진의 당찬 여자 검객 용 역의 장 지이를 보세요. 이쁘죠?)

그리고, 말띠해에 태어날 딸들에게도 말해주고 싶습니다. 굴레가 되는 사랑은 하지 말아라, 자기가 꿈꾸는 것을 그 무엇과도 바꾸지 않는 드센 기운의 여자들이 되어라, 라구요.

영화 음악 좋아하시는 분들, 이 영화 꼭 보시라고 권합니다. 요요마의 첼로 연주가 기가 막히구요, 무술 장면에 나오는, 가슴 박동 소리 같은 북소리는 놓치면 아까운 음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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