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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윤주 교수의 홈페이지

이곳에 있는 글들은 제가 2001~2년에 주부넷의 영화칼럼과 오마이뉴스의 영화란에 썼던 것들입니다.
자료를 다른 곳에 사용할 때는 반드시 출처를 밝혀주세요.

건망증이 심하신가요? 안방에서 거실을 가로질러 부엌으로 왔는데, 내가 왜 여기 왔었더라, 하는 생각으로 머리만 긁적이다가 다시 안방으로 되돌아간 적이 있으신가요? TV 위에 놓인 리모컨을 집으러 소파에서 일어났다가 TV 까지 오는 사이에 그걸 또 잊어버리고 TV 화면 앞에 잠시 멍하니 서 있었던 적이 있으신가요?

애기를 낳느라 뇌세포가 많이 파괴되어서, 나이 먹으면서 자연스럽게, 공부를 손에서 놓은 지 너무 오래되어... 갈수록 심해지는 건망증이며 기억력 감퇴에 대해서는 참 핑계도 많지요?

여기, 그런 건망증에 대한 영화가 있습니다. 사실 건망증이라고 말하기에는 조금 무리한 면이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건망증이란, 순간적으로 잊어버리지만 얼마 시간이 흐른 뒤에는, 아하, 하고 다시 기억하게 되는 증세를 말하니까요. 다시 생각해 보니 이 영화는 건망증으로 괴로워하는 많은 이들을 위로하는 영화라고 하는 게 더 옳을지도 모르겠어요. 순간적으로 잊어버리지만 얼마 후에는 다시 기억할 수 있다는 게 얼마나 큰 축복인가를 가르쳐 주는 영화니까요.



영화 "메멘토"의 주인공 레너드 셸비는 불행하게도 사랑하는 아내가 강간 당하고 살해 당하는 순간을 목격합니다. 그 끔찍한 충격 때문에 그는 기묘한 병에 걸리게 되지요. 그 충격 이전의 모든 일들에 대한 기억은 그의 머리 속에 고스란히 남아있지만, 그 사건 이후의 일들은 단지 십오분 정도밖에 머리에 담을 수 없는 것이에요. 만약 당신이 십오분 전에 레너드와 이야기를 나누었다면, 십오분 후의 레너드는 당신을 전혀 기억할 수 없는 거죠.

그게 얼마나 끔찍한 병인지 한번 상상해 보세요! 레너드는 자신이 살고 있는 모텔과 자신이 탄 차, 만났던 사람들을 모두 폴라로이드 카메라로 찍고 그 아래에 기억해야 할 것들을 적습니다. 레너드 주변에는 끊임없이 그를 쫓아다니는 테디란 인물이 있는데, 영화 첫 장면에서 테디는 레너드에 의해 살해당합니다.

흠... 윗문장을 다시 한번 읽어보세요. 뭔가 이상하지 않은가요? 테디가 영화 첫장면에서 레너드에 의해 살해당한다면 테디는 도대체 어떻게 레너드를 끊임없이 쫓아다닐 수 있었을까요? 유령으로?

에이, 첫 장면에 마지막의 사건이 나오고 그걸 회상하는 식의 영화라면 그게 가능하죠, 라고 누군가 중얼거리셨다면, 맞습니다! 바로 그겁니다! 이 영화는 말하자면 처음에, 영화 속에서 시간적으로 가장 뒤의 일이 나오고 그걸 회상하는 식으로 흘러가죠. 그러나 이 영화에서 보여주는 회상은 그저 간단한 회상이 아닙니다. 마치 레너드가 15분밖에 기억 못 하듯이, 그렇게 짧게 시간을 토막내서 그걸 거꾸로 이어붙이죠.

영화 형식상 이 영화는 그런 흥미있는 편집 방식을 보여줍니다. 결국 레너드가 왜 테드를 살해했고 어떻게 기억력을 상실하게 되었는지는, 보통 스릴러물에서처럼 마지막에 알게 되지만요.

다시 테디 얘기로 돌아가죠. 레너드 주변을 맴도는 테디, 그러나 레너드처럼 관객들은 테디를 신뢰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레너드가 테디 사진 아래에 "그를 믿지 말아라. 그를 죽여라."라고 써놓았기 때문이죠. 레너드는 자기 기억은 물론이거니와 그 누구의 말도 믿지 않고 오로지 자기의 메모만 믿고 행동하기 때문에, 주인공과 동일시하기 마련인 관객의 입장에서는, 대단히 의심스런 이미지를 주는 테디에 대한 레너드의 메모를 믿고, 첫 장면에서 테디가 죽었어도 아무런 아쉬움없이 영화를 계속해서 볼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영화 막판에 우리는 알게 됩니다. 레너드의 메모는 잘못된 것이었으며, 자기 메모를 철썩같이 믿었던 레너드와, 역시 레너드의 메모를 믿었던 관객 모두 속았다는 것을... 그때의 황당함과 배신감은 이루 말할 수 없죠.

이런, 영화에 대해 너무 많은 것을 말씀드렸나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에는 아직 즐길 만한 요소들이 많이 남아있어요. 말씀드렸듯이 영화의 특이한 편집 방식, 15분의 기억력밖에 갖지 못한 사람이 얼마나 세상을 어렵게 살아가게 되는가, 하는 것들말고도 과연 내가 여태까지 철썩같이 믿어왔던 것들을 앞으로도 철썩같이 믿고 살아도 될 것인가, 하는 중요한 질문을 하게 만들거든요? 레너드의 잘못된 메모 같은, 어떤 하나의 잘못된 기억 때문에 치명적인 실수를 저지른 것은 아닐까, 하는 질문 말이죠.

"메멘토 (Memento)"는 라틴어로 "기억하라!"라는 뜻입니다. 레너드는 자기에게 아주 중요한 사항들은 폴라로이드 사진 아래가 아니라 자기 몸에 문신을 새기지요. 그의 몸에는 글자 문신 투성이입니다. 타원형으로, 원형으로, 때로는 목걸이 형태로 그의 몸에 새겨진 문신을 보고 있자니, 내 몸 구석구석에도 눈이 보이지는 않지만 저렇게 새겨진 문신이 많겠거니, 지울 수 없지만 잘못된 문신도 많겠거니,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여러분 몸에 새겨진 보이지 않는 문신은 무엇입니까?

덧붙이는 말: 평소 스릴러를 즐기지 않으셨던 주부님들, 이번 기회에 잠시 생각을 바꾸고 "메멘토" 비디오를 빌려다 보세요. 잔인한 장면이 횡행하고 피가 흐르는 다른 스릴러물에 비해 이 영화는 머리를 많이 써서 생각하게 하는 면이 더 많습니다. 끔찍한 장면들이 거의 없지요. 머리를 써서 생각한다는 것도, 골치아픈 정치나 역사적 상황에 대해 알아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마치 퍼즐 맞추듯이 사건들을 이리저리 끼워 맞추는 식이예요. 다양한 영화를 접해본다는 면에서, 이 영화 한번 볼 만하다고, 이 연사, 소리높여, 외칩니다~! ("메멘토" 제작사에서 돈 받은 것 없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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