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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윤주 교수의 홈페이지

이곳에 있는 글들은 제가 2001~2년에 주부넷의 영화칼럼과 오마이뉴스의 영화란에 썼던 것들입니다.
자료를 다른 곳에 사용할 때는 반드시 출처를 밝혀주세요.



혹시 "소름"이라는 영화에 대해 들어보셨는지 모르겠어요. 네티즌 펀드라는, 비교적 새로운 형태의 자본으로 영화를 만들었기에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기도 했던 영화죠. (네티즌 펀드의 개념은, 주부넷의 "정보 퀴즈 대회" 문제 후보로 올려놓아도 될 것 같네요. ^^)

영화가 극장에서 상영된 건 벌써 몇달 된 일이구요, 저는 최근에 비디오로 이 영화를 보았습니다. 어땠냐구요? 여러가지 의미로 소름끼치더군요. 더 정확히 말해서는 소름"만" 끼치더군요. 그게 이 영화가 의도한 바로 그 목적, 그래서 제목도 "소름"이라고 붙인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보기도 했지만요.

제가 보기에 이 영화는 크게 두가지 틀로 나뉘어져 있는 듯합니다. 한 가지는 홈페이지나 광고 전단을 통해 떠들썩하게 늘어놓은 "공포 영화"라는 틀이고, 다른 한 가지 틀은 우리를 소름끼치게 만드는, 우리 일상의 폭력과 그에 대한 무심함 같은 거죠.

먼저 공포 영화라는 틀을 짜기 위해 보여주는 영화 줄거리를 소개할께요. 어디 창신동이나 산동네 꼭대기에 있을 법한 허물어져가는 아파트가 영화의 배경입니다. 곧 재개발이 될 건물로 고지된 탓에 웬만한 사람들은 다 이사를 나갔는데, 이 아파트 504호에 택시 기사일을 하는 용현이 새로 이사를 들어오지요. 그는 시간이 지나면서 이웃 사람들을 하나하나 알아갑니다. 그와 빠른 속도로 가까워진 이웃은, 편의점에서 일을 하는 한 여자. 그녀에게는 구타를 일삼는 남편이 있고 그 남편과의 사이에 두었던 아들 영준은 행방불명 되었습니다. 어느날, 그녀가 피투성이가 되어 김씨 앞에 나타납니다. 구타에 못 이겨 남편을 죽인 거죠. 용현은 그녀를 도와 그녀 남편의 시체를 암매장합니다.

이웃 중에는 용현의 아파트에 유달리 관심을 가지는 전직 출판사 사장이 있습니다. 그는 추리 소설을 써서 한몫 잡으려고 하지요. 그의 소설의 배경은 이 아파트하고도 504호입니다. "30년 전에 504호에 살았던 한 부부가 있었는데, 그 남편이 미쳐버렸는지 아내를 죽이고 갓난쟁이만 집에 놔두고 어딜 갔어. 그 갓난쟁이는 혼자서 응애거리며 울다가 어느날 난 화재에 불타서 죽어버렸지..."

504호에서는 또 한 사람이 죽어나갔습니다. 이웃 중의 하나인 은수라는 아가씨의 남자친구였던 광태가 그 사람이죠. 어느날 화재가 나서 죽었다는군요.

자기가 사는 집에서 세명이나 죽어나간 셈인데도 용현은 천연덕스럽게 말합니다. "귀신이 어디 있어요, 난 그런 거 안 믿어요..."

어떠세요? 공포 영화 같은 느낌이 드는 줄거리인가요? 돌고 도는 운명의 고리, 그걸 벗어날 수 없는 인간 군상... 이런 요소들을 가지고 판을 짜 놓은 공포 영화적 틀은 그러나 아쉽게도, 관객들에게 너무 친절했던 감독 때문에 다소 기운이 빠집니다. 한마디로, 공포 영화에서 중요한 긴장감이 부족했던 거죠. 장면마다 소름끼치라고 음향 효과나 조명을 가지고 이리저리 장난을 해보지만 그것도 사건과의 연계성이 부족한 탓에 특별한 긴장감을 가져다 주지 못합니다. 그리고 어느 정도 영화를 보다 보면 아아, 이제 어떻게 되겠군, 하는 걸 예측하게 만들거든요. 깜짝 효과가 없는 공포 영화는 정말 김 빠진 맥주같아요.

이제 이 영화의 다른 틀을 한번 들여다 보기로 하지요. 허물어져 가는 아파트, 그곳을 떠도는 30년 전의 유령... 이 설정을 보자마자 저는 왠지 허술한 우리나라의 경제적, 정치적 기반이 떠오르더군요. 그 허술한 기반들 때문에 더 휘청거리는 우리나라 사람들의 정신적 상태는 말할 것도 없구요. 우리에게도 30년 전의 유령이 떠돌고 있지 않습니까? 박정희의 망령이 우리나라 사람들을 휘감아 소름끼치는 그 유신 시기를 되살리려고 하고 있잖아요?

이 틀에서도 감독은 몹시 친절해서, 이런 정치적 틀에서 관객이 주의를 기울여 보아야 할 장면들을 슬로우 모션으로 처리해줍니다. 취객 하나를 싣고 택시를 모는 용현, 터널 안에서 요리조리 왔다갔다 하는 야식 배달 오토바이꾼 때문에 몹시 짜증이 나죠. 그걸 본 취객 하는 말, "아 박아 버려 박아 버려! 저런 새끼들 때문에 우리나라가 민주화가 안 되는 거야!" 점점 가까이 다가가는 택시, 오토바이는 스을쩍 비켜나 버립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터널을 다 빠져나와 보니까 그 오토바이 탄 사람이 교통 사고로 죽어있는 거예요. 취객은 좋아라 박수를 치며, "아~ 속시원하다. 그 새끼 죽으니까 내가 십년 묵은 체증이 다 내려가는 것 같네~" 하며 낄낄대고 용현 역시 그 장단에 맞춰 신나게 웃어제낍니다. 우리들 인간에게 숨어있는 말할 수 없는 잔인함이 소름끼치도록 재현되는 장면이었죠.

또 한가지 인상적인 장면은 용현이 남편을 죽인 여자에게 고백하는 부분입니다. "세상 속 편하게 사는 방법이 뭔지 알아? 나 고등학교 때 날 고아라고 놀린, 집안 좋고 성적 좋은 새끼 하나가 있었어. 싸움으로도 이길 수가 없으니 괴로워 죽을 지경이었지. 그래서 어느날 학교 뒷산으로 불러내 가지고 칼로 찔러 죽이고 묻어버렸어. 그러고 나니까 속 편하대." 뭐든지 묻어버리고 세상 편하게 살려고 하는 방식. 이거, 어딘가 우리 사회의 닮은 꼴 아닙니까?

결론! 이 영화는 공포물의 요소와 사회 풍자적 요소를 교묘하게 섞어서 무섭고도 뭔가 남는 게 있는 영화로 등극하려는 시도를 했던 듯합니다. 하지만 그 두가지 틀 사이에서 엉거주춤하게 서 있느라, 그 두가지 중 어느 하나도 훌륭하게 살리질 못했다, 하는 느낌이 들더라구요. 앞머리에 제가 말한 소름"만" 끼쳤다는 게 바로 이런 맥락에서이지요. 오금이 저려올 정도로, 혹은 으악, 하고 고함을 지를 정도의 공포가 아닌 소름이 오도독, 끼치다 마는 정도의 공포성과 우리 일상 생활에서 우리가 모르고 지나가버리는, 이 사회의 허술한 구조와 우리 정신 세계의 뒤죽박죽 등이 영화를 보면서 서늘하게 느껴집니다. 쇼킹하지는 않지만 한번 생각해 보게는 하지요.

공포에 대한 더듬이가 남보다 훨씬 잘 발달된 분들이라면 이 영화를 한번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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