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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윤주 교수의 홈페이지

이곳에 있는 글들은 제가 2001~2년에 주부넷의 영화칼럼과 오마이뉴스의 영화란에 썼던 것들입니다.
자료를 다른 곳에 사용할 때는 반드시 출처를 밝혀주세요.

제가 김기덕 감독의 영화를 처음으로 보았던 건 혼자 방에 처박혀 홀짝홀짝 맥주 마셔가며 일상은 참으로 지루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마침 책상 위에 올려져 있던 "섬"이라는 영화 씨디가 눈에 띄더군요. 노느니 염불, 아니 영화나 보자 하는 심정으로 그 씨디를 컴퓨터에 집어 넣고 큰 기대감 없이 화면을 바라보고 앉았었지요.

아마 "섬"을 보신 분들은 이미 짐작하실 겁니다. 이 영화가 결코 노느니 염불하는 심정으로 볼 작품은 아니라는 걸... 저는 처음엔 알딸딸한 취기로 게슴츠레하게(!) 눈을 뜨고 영화를 보다가 나중에는 휘둥그래하게 눈을 떴고 그 뒤로는 눈썹을 잔뜩 찌푸린 상태로 시종일관 화면을 뚫어지게 바라볼 수 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오늘 소개할 영화는 "섬"이 아닙니다. 부산 영화제에서 소개된 김기덕 감독의 최신 영화 "나쁜 남자"가 오늘의 영화입니다.



너무나 안 씻은 탓인지, 어쩌다 보이는 하얀 부분이 오히려 때처럼 보일 만큼 시커먼 남자 하나가 아이스바를 씹어먹으며 길을 가고 있습니다. 번득번득하는 그의 레이다망에,  "서양 미술사"라는 두터운 책을 무릎에 올려놓고 벤취 위에 예쁘게 앉아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는, 여대생으로 보이는 여자가 걸립니다. 한참을 뚫어지게 바라보는 남자의 시선에, 관객 모두는 여우의 감시망에 걸린 줄 모르고 열심히 풀을 뜯어먹고 있는 토끼의 심정이 되어 오돌오돌 떨기 시작하지요. 그러나 다행히 여자의 남자친구가 여자에게 다가오고, 아이 왜 자기 이렇게 늦었어 하는 여자의 대사를 들으며 아, 별 특별한 일은 일어나지 않겠구나 하고 잠시 안심을 하게 되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기는요, 일어나야 영화가 되겠죠... 그 시커먼 남자는 득달같이 여자에게 달려들어 강제로 키스를 합니다. 무지막지한 남자의 힘에서 여자는 빠져나올 수 없고, 하얀 손가락의 남자 친구 역시 옆에 있는 금속 쓰레기통까지 들어 시커먼 남자를 후려쳐 보지만, 시커먼 남자는 그에 아랑곳없이 자기의 욕심을 채울 대로 채운 뒤에야 여자를 놓아줍니다.

놓여난 여자는 비명을 지르고 백주 대낮에 일어난 일이라 뭐 재미있는 일 없나... 하고 모여든 군중 속에서 그 시커먼 남자는 여자와 그 남자친구 뿐 아니라 어디선가 갑자기 나타난 해병대 군인 세명에게 무차별한 구타를 당합니다. 사과하라는 여자와 군인들의 말에 그는 끝까지 침묵으로 일관하고, 여자는 퉤, 하고 침을 뱉고 그 자리를 떠나갑니다.

불과 몇분 안 되는 첫 장면을 제가 너무 자세히 묘사했나요? 사실 기상천외한 이 영화의 스토리는 그 뒤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됩니다. 모욕당한 남자는 분노에 못 이겨 여자를 자기가 속한 직업 전선, 곧 창녀촌으로 데려오기로 결심합니다. 그녀를 계속 미행하던 남자는 책방에서 화집을 보고 있는 그녀 옆에 몇백만원 돈이 든 지갑을 슬쩍 놓고 나오고, 그녀는 그 미끼에 걸려들어 지갑을 자기 가방에 집어넣지만  몇분 지나지 않아 발각되고 말지요. 각본대로, 한 남자가 그녀를 쫓아와 이 지갑에 들었던 나머지 돈은 어디 있냐고 호통치기 시작하거든요. 그녀는 결국 "신체 포기 각서"라는 걸 쓰고 나서 고리대금업자에게 돈을 빌려 남자에게 돈을 갚을 수밖에 없는 상황에 이르고 그 뒤로는 시커먼 남자가 바라던 대로 창녀촌에 끌려가 창녀가 됩니다.

사실, 이런 줄거리를 이렇게 나열한다는 건 큰 의미가 없을 겁니다. 그녀가 창녀가 되기까지의 과정도 그리 개연성있게 보이지는 않습니다. 그 뒤의 사건들은 더더욱 그렇구요. 김기덕 감독의 영화를 사실주의적으로만 따라가신다면 십중팔구, 이거 뭐야 도대체, 라는 말이 저절로 입에서 나올 겝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가 첫 장면과 그 뒤의 스토리를 길게 늘어놓은 것은, 이 두 장면들에 김기덕 감독이 이 영화를 통해 말하려고 했던 메시지들이 잘 묘사되어 있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시커먼 남자와 비교되는 하얀, 잘 교육된 것처럼 보이는 여자가 무릎에 얹어놓은 "서양 미술사"라는 책. 남자와 그 책 사이의 간극은 하늘과 땅만큼이나 멉니다. 계급적 차이라고 표현해도 무리가 안 되겠지요. 이 계급적 차이가 허물어져 가는 과정을 우리는 영화 속에서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해야 계급적 간극을 없앨 수 있다, 라는 혁명적 메시지를 던진다는 건 절대 아닙니다. 그저 우리로 하여금, 내가 딛고 있는 계급적 기반이 얼마나 허약한 것인가, 그게 과연 중요하기는 하단 말인가, 하는 다소 허탈한 자기 돌아보기를 하게 만듭니다.

시커먼 남자에게 일방적으로 키스 당하는 그 여자를 보면서 관객은 처음에 아니, 저런 폭력이! 하고 분개하게 됩니다. 그러나 다음 순간, 얼룩덜룩 해병대 군복을 입은 남자들에게 무차별 구타를 당하는 그 남자를 보면서 저는, 아, 우리 사회에서는 어떤 순간에는 어떤 이들을 향해서는 무차별한 폭력도 당연시되지, 하는 생각을 새삼 하게 되더군요. 삼청 교육대가 언뜻 제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면 그건 너무 무리한 연상 과정일까요?

생각해 보면, 김기덕 감독은 "과연 무엇이 죄란 말인가?" 하는 질문을 이 영화 전체를 통해 끊임없이 던지고 있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포주 일을 하면서, 자기 구역을 지키기 위해서, 자기 구역의 창녀들을 보호해 주기 위해서 칼을 휘두르고 주먹을 휘두르는 이 시커먼 남자의 죄악과 책방에서 자기가 갖고 싶은 화집의 그림을 몰래 뜯어내고, 남이 보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누군가 두고 간 지갑을 슬쩍 하는 여대생의 죄를 비교하며 그래, 인간은 기본적으로 모두 사악한 거 아냐? 하고 말하고 싶은 게 감독의 의도 아닌가 모르겠단 말이죠.

또 한가지 김기덕 감독이 시종일관 그의 영화에서 다루는 단골 테마 중의 하나는 "성"입니다. 이 영화에서도 우리는 "성"에 대한 그의 새로운 시각을 볼 수 있는데, 제게는 해피 엔딩으로 보이는 이 영화의 결말은 "엽기적인 그녀"의 엽기성을 백배쯤 능가하는 슈퍼 울트라 기간틱 따뜻한 엽기입니다. 말씀드리면 김이 빠질 터이니 이쯤에서 말구요...

영화가 끝나고 나서 기습적 "감독과의 대화"가 있었습니다. 관객 중 많은 이들이 김기덕 감독의 열혈팬인 것 같았어요. 대부분 김기덕 감독의 이제까지 영화들을 모두 보았던 듯하더라구요. "왜 감독님 영화에 조재현 씨가 자주 주연으로 등장합니까?"라는 질문에 감독의 대답: "사실 유지태니 이정재니 하는 다른 유명 배우들에게도 시나리오를 모두 보내봤어요. 그런데 누구도 이 역을 맡고 싶어하지 않더군요. [영화를 보고 나면 왜 그런지 이해하실 겁니다. - 필자 주] 그런데 조재현 씨는 그 사정을 다 알고서도 맡겠다고 했어요. 사실 조재현 씨는 제 영화의 캐릭터를 매우 잘 이해하고 계신 분이죠."

조재현의 카리스마는 이 영화에서 대단한 힘을 발휘합니다. 그가 아니었더라면 이 영화가 이만큼 살지 못했을 거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이쯤해서 제 수다는 그만 줄이기로 하지요. 노파심에서 말씀드리자면, 기분전환이나 달콤한 로맨스를 즐기기 위해서라면 절대로 이 영화를 고르지 마십시오. 인생 공부 좀 해보자, 하는 진지한 마음이 생기는 어떤 날이 온다면, 그때 이 영화를 보러 가시라고 권하고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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