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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윤주 교수의 홈페이지

이곳에 있는 글들은 KBS Worldnet 에 있는 제 영화 칼럼 "New German Cinema" 에 실린 글들입니다.
자료를 다른 곳에 사용할 때는 반드시 출처를 밝혀주세요.

오늘 소개드리려는 영화는 2002년 베를린 국제 영화제에서 "은곰상"을 수상한 "Halbe Treppe"입니다. 영어 제목은 "Grill Point" 인데요, "중간 계단"이라는 뜻의 "Halbe Treppe"는 이 영화에서는 계단과 계단 사이의 공간에 위치한, 우리나라로 치자면 포장마차쯤 되는 곳의 이름입니다.

영화의 중심 인물들은 바로 이 "Halbe Treppe"의 주인인 우베와 그의 아내 엘렌, 엘렌의 여자친구인 카트린과 남편 크리스입니다. 엘렌은 향수 가게 점원이고 카트린은 트럭 집하장에서 일하지요. 크리스는 한 라디오 방송국에서 그날그날의 별자리 운세를 말해주는 디제이로 일합니다. 이 중의 누구도 자신의 직업에 썩 만족하며 사는 이는 없어 보입니다. 카트린은 비행기 조종사가 꿈이었으며 지금 살고 있는, 생기 잃은 구 동독 도시 프랑크푸르트 암 오더(오더강가의 프랑크푸르트는 마인강가의 프랑크푸르트와 다릅니다. 여러분이 알고 계신 유럽의 관문 프랑크푸르트는 마인강가에 있지요.)를 떠나 언젠가는, 이를테면 오스트리아 비인 같은 도시에서 살아보는 것도 좋겠다, 하는 꿈을 꾸죠. 남들에게 꿈도 주고, 경고도 해주는 직업을 가진 크리스는, 그런 직업을 가진 이들이 흔히 그렇듯이 자기 자신에게 희망과 경고를 주지는 못하는 듯해 보입니다. 그는 일상을 지루해하고 그러다간 특별한 열정도 없이 아내 카트린의 친구 엘렌과 정사를 시작하죠. (독일에서 아직 이 영화가 개봉되지 않은 이유로 웹상에서 영화 포스터를 찾기가 힘드네요. 윗쪽 사진은 17 Hippies 의 영화 사운드트랙입니다. 창문 뒤로 보이는 게 트럭 집하장에서 일하는 카트린이죠.)

포장마차 주인으로 썩 어울리는 모습을 지닌 우베는 향수 가게 점원인 아내 엘렌이 가진 낭만성을 이해하지 못하지만 충실한 가장으로 열심히 살아갑니다. 영화를 보는 내내 관객들에게 호감을 갖게 하는 인물은 바로 이 우베예요. 한마디로 바람난 유부녀인 엘렌이 크리스와 살겠다고 집을 나갔을 때도 그는 남겨진 남매를 챙기느라 동분서주하고, 자신의 고통 속에서 오히려 남들을 감싸안는 포용력을 보여줍니다. "Halbe Treppe"의 음악을 담당한 사람들이 "17 Hippies"라는 그룹이거든요? 이미 독일에서는 이름난 이 그룹은 모두 열일곱명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음악만 담당한 것이 아니라 실제로 영화에 출연합니다.

어느날 아침 포장마차로 출근한 우베는 자기 포장마차 바로 앞에서 청승맞은 음악을 연주하는 거리의 음악가를 보고 한마디 하죠. "설마 하루종일 거기 서있을 건 아니지?" 그러나 그 다음날 그 음악가는 자기의 동료를 데려오고, 영화가 진전되면서 동료들은 갈수록 늘어만 갑니다. 우베가 엘렌을 잃은 상처 때문에 괴로워하면서 일상을 겨우겨우 영위해 나갈 즈음엔 거의 열일곱명이 총출동하죠. 우베는 이들을 자기의 포장마차 안에 초대합니다. 갑자기 조그만 포장마차가 음악회장이 된 냥 즐거운 음악으로 가득 차고 영문 모르는 손님들은 덩달아 즐거워하죠. (왼쪽 사진은 우베의 포장마차에서 연주하고 있는 17 Hippies 의 모습입니다.)

전 이 영화를 보면서 우리나라 감독 홍상수의 작품들을 생각했어요. 크리스와 엘렌의 정사는 애틋하지도, 비극적이지도 않고, 일상의 치부를 덤덤히 그려내는 그 맛이 홍상수 작품과 비슷하더라구요. 결국엔 다들 자기의 일상으로 그럭저럭 돌아갑니다, 엘렌만 빼놓고요. 다시 자기 부인 카트린에게 돌아가며 엘렌에게 그저 "미안해" 한 마디만 남기는 크리스와 달리, 엘렌은 우베에게 돌아가지 못하고, 오랜만에 집을 찾은 엘렌이 다시 자기에게 돌아온 줄 알고 기뻐하며, 새롭게 단장한 집안의 부엌 가구를 보여주고는 "새 부엌, 새 인생"이라고 말하는 우베에게 "당신은 아무 것도 이해하지 못해요!" 하면서 뛰쳐나가는 엘렌... 그런데 이런 설정조차도 상당히 일상적으로 보이더군요. 남자는 돌아갈 수 있어도 여자는 이런 상황에서 돌아가기 힘든 게 현실이잖아요...

앞서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구 동독 도시 프랑크푸르트 암 오더의 답답하지만 출구가 보이지 않는 미래가 이, 극도의 빈곤 상태에 처해 있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마냥 안전하지만은 않은, 아슬아슬하지만 또 그럭저럭 삶을 살아가는 네 사람의 일상을 통해 그려져 있습니다, 마치 제목이 의미하는 "중간 계단"에 서 있는 사람들처럼요.

이런 영화에 "은곰상"을 수여할 줄 아는 베를린 영화제가 새삼 대단해 보이더군요. 핸드 헬드 카메라로 찍은, 도무지 큰 돈 들 일이라고는 없었을 것 같은 이 영화는 일상의 지루함과 답답함이 주된 분위기이지만, 우리가 일상을 살면서 소소한 일에 피식, 웃음짓거나 껄껄, 하고 웃어제끼게 되는 것처럼 요소요소에 웃음도 심어 두었습니다. 그 두가지 요소들이 합쳐져서 제게는 마치, "인생은 대단한 게 아니야. 하지만 그래도 한번 살아볼 만하잖아?" 하고 따뜻하게 말을 걸어오는 듯이 느껴지더군요. 이 영화의 이런 작은 대단함의 힘을 발견한 베를린 영화제에 박수를 보냅니다.

2002.0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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