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kip to content

강윤주 교수의 홈페이지

이곳에 있는 글들은 제가 2001~2년에 주부넷의 영화칼럼과 오마이뉴스의 영화란에 썼던 것들입니다.
자료를 다른 곳에 사용할 때는 반드시 출처를 밝혀주세요.

5년 전 12월, 대한민국에 사는 사람들은 누구 하나 예외라 할 수 없이, 깊은 주름살 하나씩 얻는 사건을 경험했다. 어떤 이는, 우리를 나무라 치자면, 우리의 97년 이후 나이테에는 깊고 굵은 상처 하나가 새겨졌을 거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영어를 모르는 칠십 노인이나 세살박이 꼬마에게도 익숙한 이름으로 다가오기 시작한 IMF. 아닌 밤중에 홍두깨 식으로, 멀쩡하던 우리나라 경제가 갑자기 생소한 이름의 이 단체로부터 “관리”를 받아야 했던 것이다.
그때 많은 영화들이 IMF 체제에서 붕괴된 가족의 이야기를 다루었다. 엉뚱하게도, 속상한 사람들 실컷 울고 나서 마음이나 풀라고 시한부 인생 남편의 이야기를 다룬 “편지” 등의 최루성 영화들도 양산되었으나 그보다 사람들을 더 울린 건, 결코 남의 이야기일 수 없는, IMF 체제에서 실직된 가장과 그의 실직으로 붕괴되어가는 가족을 그린 사실적 영화들이었다. 대표적인 단편 영화로는 송일곤 감독의 “소풍”을 들 수 있겠고, IMF 체제 직후가 아니라 작년에 나와, 일종의 “후일담 영화”처럼 느껴지는 장편물로 “베사메무쵸”가 있다.
오늘 소개하려는 영화는 바로 이 “베사메무쵸”다. “베사메무쵸”를 지금 소개하는 이유는, 아무리 언론에서 IMF 가 지나갔다는 식으로 떠들어대도 여전히 남아 있는 상처를 돌아보기 위해서이기도 하고, 좋은 영화가 크게 빛을 보지 못하고 묻혀 버렸다는 데에서 오는 아쉬움 때문이기도 하다. 가정을 가진 이라면 누구라도 이렇게 저렇게 생각해 볼 수 있는 요소가 참 많은 이 영화의 몇 장면을 함께 들추어보기로 하자.
 


일본식 “팬시” 드라마를 연상시키는 이 영화의 도입부에서는 아이 넷의 부모인, 그래서 정신없지만 또 행복해 죽겠다는 분위기를 보여주는 어머니 이미숙(영희)과 아버지 전광렬(철수)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아이들은 건강하고 귀여우며, 방이 넉넉하지 못해 거실을 침실로 쓰고는 있지만 집안 곳곳에는 아이들이 만든 각종 공작품이 배치되어 참으로 따뜻한 가정임을 알 수 있다. 어머니는 소리소리 지르며 아이들을 깨우고 밥을 먹이지만 자고로 사랑이 배인 고함소리는 따뜻하게 느껴지는 법이다. 아버지는 증권 회사 직원으로, 엘리트 직원으로 대접 받는 것 같지는 않지만 부하 직원들의 존경을 받으며 성실하게 일하는 가장으로 그려진다.
이런 행복한 집안에 다가온 재난은 회사 상사들의 음모에 가담하지 않으려는 아버지의 성실함 혹은 고지식함 때문이었다. 불법적인 일을 강요하는 상사들의 말을 듣지 않았던 그는 무능하다는 이유로 해고되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믿었던 친구는 부도를 내고 야반도주를 해, 빚보증을 섰던 그는 이제 하나밖에 없는 집까지 잃게 생겼다.
완벽한 행복을 구가하는 듯이 보이던 이 집안이 가진 문제점이 이제 하나둘 밝혀진다. 이들 부부는 가난한 신혼 생활 때 큰아이를 천식으로 잃었다. 영희는 울부짖는다. “나는 아이가 아픈 줄도 모르고 그 좁은 반지하방에서 먼지 풀풀 날리며 재봉틀을 돌렸어!” 또한 철수의 형이 남기고 간 빚을 떠안아야 했고 빚만이 아니라 형의 아들, 곧 조카까지도 맡아 키워야 했던 것이다.
집안의 문제점이 하나둘씩 드러나면서 이 영화 전개상의 문제점도 하나둘씩 드러난다. 가장의 실직이라는 점에서는 이른바 “IMF 영화”, 가정의 붕괴와 화해라는 점에서는 “가정 영화”, 붕괴되어가는 가정 속에서, 서로 사랑하지만 갈등하는 철수와 영희의 애정 관계를 보여주는 면에서는 “멜로물”이라는 딱지를 집달리들이 철수 집안 물건에 붙이듯이 하나씩하나씩 붙이다 보면 참으로 풍부한 이야깃거리를 지닌 영화처럼 보이기도 하는데, 문제는 이 이야기들의 흐름이 어느 부분에서는 전혀 설득력없게 느껴진다는 점이다.
형의 빚뿐 아니라 아들까지 떠맡아 친아들처럼 키우는 식의, 나랏님도 못해줄 보험 처리는 서구에서는 상상도 못할 일이다. 사실 2002년 한국, 이 각박한 현실에서 이런 상황이 오면 철수나 영희처럼 할 수 있겠느냐는 질문에 자신있게 “예!”라고 대답할 수 있는 이들은 많지 않을 것이다. 어쨌든 이렇게 도타운 분위기의 집안에서, 애가 줄줄이 넷이나 딸린 철수와 영희 집안이 남의 빚보증 섰다가 1억 때문에 길거리에 나앉게 생겼는데 어찌 그리들 조용한지… 아니 조용한 정도가 아니라 시부모님이고 친정부모님이고 또 동생이고 형이고 아무도 등장, 아니 대사에조차 언급되지 않는다.
또한 한때 그 소재의 파격성 때문에 인구에 회자되었던 데미 무어, 마이클 더글라스 주연의 영화 “폭로”를 쏙 빼다 박았다는 비난을 피하기 위해 “폭로”의 상황을 아예 더 극대화해버린 듯한 느낌을 주는 상황 설정은 어떤가. 영희는 자기를 따라다녔던, 지금은 준재벌이 된 옛 고등학교 선배로부터 유혹을 받고 (하룻밤 같이 보내면 1억을 주겠다는), 철수는 평소 쭉쭉빵빵한 남자들만 좋아할 것 같은 어느 “사모님”으로부터 유혹을 받는다. (철수의 몸은 결코 쭉쭉빵빵하지 않은데, 그 “사모님”이 왜 그와 1억이나 드는 하룻밤을 보내려 드는지는, 그녀가 기어코 철수집 침대에서 관계를 갖고 싶어하는 데에서 설명된다. 한마디로 그녀는 “변태적 정복욕”을 가진 여자다.) 남편과 부인이 동시에 “하룻밤에 1억”이라는 유혹을 받는다는 설정은 너무 억지스러워서 그때까지 아슬아슬 지켜지던 “리얼리티”는 박살나버린다.



박살난 “리얼리티” 자리에 들어서는 건 그 유혹을 필사적으로 이겨내보려는 두 사람, 특히 영희의 노력이다. 그녀는 몇번이나 선배를 찾아갔다간 돌아서고 찾아갔다간 다시 돌아선다. 선배는 묘한 이중성을 보여주는데, 그녀의 고등학교 때 사진을 여전히 간직하고 아련한 옛추억을 더듬으면서도, 자신이 보낸 편지를 열어보지도 않았던 그 고고한 첫사랑이 처참한 모습으로 찾아와 구걸하는 상황에서, 일말의 동정심 없이 단지 “돌아가려면 돌아가. 선택은 네가 해.”하는 식으로, 하룻밤 보내지 않아도 좋으니 1억을 가지고 가라 식의 은혜는 끝까지 베풀지 않는다. 여기서 이 영화는 철수와 영희의 멜로가 아니라 영희 개인의 멜로, 곧 아내로서 정조를 지킬 것인가, 아니면 어미로서 자식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할 것인가의 선택 사이에서 괴로워하는 한 여자의 멜로로 변해간다. 정조 이야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이 “정조”를 둘러싼 남편의 반응은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 만드는 면이 있다. 선배와의 하룻밤 대가로 받는 돈 1억으로 영희는 아파트를 구해내고 남편의 취직과 함께 모든 것은 예전으로 돌아간 듯싶지만 영희 마음속은 지옥이다. 괴롭게 얼마간을 보내던 그녀는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 남편에게 고백을 한다. 관객은 그 순간 이미 남편이 그 사실을 선배를 통해 알고 있음을 본다. 고백하겠노라는 영희에게 남편은 “한마디만 더 하면 가만 안 둘 거야!”라고 호통치고, 그 호통에도 아랑곳없이 영희는 사실을 있는 대로 고백한다. 철수는 왜 얘기했느냐고, 나와 아이들을 생각한다면 무덤까지 혼자 가지고 가야지 왜 이야기했느냐고, 이제 우리는 마주보는 것만으로도 고통일 텐데 어떻게 살아야 하느냐고 절규한다.
이 순간 우리는 합리적 기만과 고통스러운 진실 중 무엇을 선택해야 하는가에 직면한다. 진실은 대개 고통스러운 법이지만 “진실했다”는 것 하나만으로 명예를 얻는다. 순결이 더럽혀진 여성들의 은장도 자결은 “불행 중 다행”인 것이다. 죽음으로서 명예를 얻었다는 말이다. 그러나 영화 속 이 경우는 누구도 영희에게 잘 했다 한마디 던져주지 않는다. 한 움큼 위로라도 얻을 수 있으리라 기대했던 남편은 되려 왜 그 사실을 고백해서 우리 가정의 행복을 깨느냐고 비난한다. 진실을 고백하든 계속 기만하고 살아가든 그 고통의 질과 색깔이 다를 뿐이지 이러나 저러나 고통스러웠을 영희 혼자 감당했어도 되었을 몫을 왜 철수에게로, 그리고 그 결과로 아이들에게까지 전가시키느냐는 것이다. 결국 영희의 고백은 고통의 확대 재생산이라는 결과를 낳았다는 판정을 받는다.
사면초가가 되어버린 영희는 가출하고 철수는 깨어진 가정 때문에 절망한다. 그러나 이게 웬일, 다시 영희는 돌아오고 영화는 고통스러운 진실에게 해피 엔딩이라는 영광을 선물한다. 고통스럽지만 그래도 가정은 다시 지켜져야 한다는 해묵은 전통을 깨지 못하고…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IMF 로 깨어진 가정들이 고통스러운 진실을 껴안고 다시 결합하는 경우는 그리 많지 않다. 실직한 가장들은 가정의 울타리 안에 소속되지 못해 거리를 떠돌다 구천을 떠도는 영혼이 된 경우가 많았고 그들의 아내와 그들의 자녀들이 어디를 떠돌게 되었는지는… 당사자들과 하나님만 안다.


덧붙이는 말: 흐르는 음악은 김민기의 "가을 편지"다. 철수가 절망에 빠져 영희와 처음 만났던 까페 "베사메무쵸"를 찾았을 때 흐르던 음악이다. 당신은 당신의 애인, 혹은 남편과 어디서 처음 만났는지?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날짜 조회 수
33 Belle 2013.07.21 651
32 [슈퍼 사이즈 미], 초콜렛칩 박아 넣은 어머니표 호밀빵 2013.07.21 792
31 [시민의 신문]에 실린 "80일간의 세계일주" 기사 2013.07.21 767
30 계간 [독립 영화]에 실린 서울환경영화제 소갯글 2013.07.21 633
29 여자는 세상의 미래다. 2013.07.21 630
28 금기된 사랑의 초상, [파 프롬 헤븐] 2013.07.21 730
27 섹스보다 더 좋은 게 뭘까? 2013.07.21 607
26 이 영화 외면하면 십리 못 가 발병 나오! 2013.07.21 687
» 정조와 모성애 사이에서... [베사메 무쵸] 2013.07.21 690
24 영화 [죽어도 좋아]의 에로틱한 행복 2013.07.21 783
23 사랑, 그 쓸쓸함에 대하여. 영화 [버스, 정류장] 2013.07.21 726
22 유연함과 고고함이 빚어낸 한판 야구 이야기 2013.07.21 705
21 딸로 다시 태어난 아내와의 사랑 2013.07.21 618
20 결혼은, 미친 짓인가? 2013.07.21 631
19 의정부의 로미오와 줄리엣 - 오아시스 2013.07.09 707
18 세상 끝 희망의 섬, [꽃섬]으로 함께 가실래요? 2013.07.10 662
17 유쾌한 택시기사들 - 라이방 2013.07.09 727
16 I am Sam 2013.07.08 678
15 정신병자 남편 사랑하기- '뷰티풀 마인드 2013.07.10 808
14 바람둥이 청년의 몰락 '바닐라 스카이' 2013.07.10 995
Board Pagination Prev 1 2 Next
/ 2

Powered by Xpress Engine / Designed by Sketchbook

sketchbook5, 스케치북5

sketchbook5, 스케치북5

나눔글꼴 설치 안내


이 PC에는 나눔글꼴이 설치되어 있지 않습니다.

이 사이트를 나눔글꼴로 보기 위해서는
나눔글꼴을 설치해야 합니다.

설치 취소